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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퐁 기자단] 최저임금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림과 홉스봄으로 알아보는 알바와 고난의 행군 4편-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농업에 대하여(1)
BY 한윤구2020.08.23 12:12:14
332190

[재능퐁 기자단] 최저임금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림과 홉스봄으로 알아보는 알바와 고난의 행군 4편-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농업에 대하여(1)

 

고굉중, <한희재야연도>

#1

지난 시간에 나는 여러분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두가지 관점을 소개해주는 시간을 갖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이 무색하게 필자의 전문성이 지적받을 가능성이 큰 부분이니 감안하고 보았으면 한다. 혹시 틀린 게 있으면 아래 댓글도 달아주시고 쓸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고소를 하기 바란다. 나도 유명해지고 싶다....

이렇든 저러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소략적인 순서는 지난 시간까지 이야기를 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볼 때 프랑스 혁명의 종점을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보지만, 필자는 그런 거 신경 안쓰고 일단 71년 파리 코뮌까지 다이렉트로 설명했다. 굳이 끊어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설명할 관점,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이 적용되는 대상은 결코 71년까지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것이 아니다.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 이전까지에 한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앞서 설명한 기존 학설에서의 시대 구분을 따르는 것뿐 아니라 엄연히 99년 이전의 혁명과 71년 이전의 혁명이 그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99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농업이 경제에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71년 이전은 184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그리고 이전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것으로 보였던, 그래서 건륭제가 영국 사신에게 무릎 꿇으라고 윽박 질렀던 청나라가 사실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마음 놓고 제국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 문화적으로도 기차역 등이 생겨나면서 도시의 산보객들이라는 보들레르의 말과 같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소위 긴 중세를 마무리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근대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2

물론 여기서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우리가 1920년 하버가 질소 비료를 만드는 소위 식량 혁명이 벌어지기 전까지 농업이라는 것은 도시화뿐 아니라 경제 전반의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당시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는데 99년 이전의 프랑스 전체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89%에 이른다. 괜히 사농공상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당시 유럽도 농업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었고, 농업은 늘 경제의 핵심이었다. 이는 이후 모든 경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필자는 경영학과이지만 아주 간단하게 경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경제를 발전하기 위해서는 의외로 가장 중요한 것이 환경이다. 현대 산업 혁명의 핵심 공간은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주로 도시이다. 이전의 경제적 중심은 철저히 농업이었는데 이 농업을 역전하고 처음으로 도시가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 도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도시에 끌어들인 요인과 함께 도시를 유지할 요인들이 필요하다. 일단 도시로 끌어들일 요인은 당시 방직과 방적 기술에 따른 수많은 일자리가 있다. 한편, 도시를 유지할 요인은 바로!!! 농업이다. 내가 왜 농업을 강조체로 적었느냐. 사람들이 의외로 이 농업을 지나치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 사회는 이 식량 문제를 크게 겪지 않고(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산업화에 성공해서였던 듯하다.

당연히 도시가 성립하려면 농촌에서 나오는 생산력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먹이고 살려야 한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너무 당연한 것인데 이를 학교에서도 잘 가르치지 않아서 사람들이 쉽게 놓친다. 이를 놓쳐 버리면 이후의 모든 산업 혁명에서 나오는 문제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당장 이 농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국가 시스템이 붕괴하는 경우가 식량 혁명 이후에도 왕왕 드러난다. 일단 이 일본은 조선을 강탈할 때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바로 무제한 곡물 유출(조일 수호 규칙)이며 이후 산미 증식 계획 역시도 본인들의 급격한 도시화를 메우기 위해 쌀을 이출해가지 않았던가. 이는 스탈린 시절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졌고 이에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를 침탈하여 이를 메우기도 한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벌어지는(숄로호프 소설에 나온다는데 읽어보지 않아서 패스) 참사가 벌어진다. 참고로 우크라이나는 이후 히틀러한테도 당한다(바르바로사 작전). 애도를 표하는.... 물론 소련은 이 농업 문제를 죽을 때까지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미 냉전시대에도 미국에게 밀 수입을 15% 정도 수입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후 소련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아마 소련이 미국 위치에 미국이 소련 위치에 있었으면 아마 소련이 저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았을걸? 역사는 기본적으로 다각적인 원인이 교차하는 곳이다. 어떤 이념이 체제를 붕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3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Бурлаки на Волге)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 소장

여하튼 이는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식량혁명을 통해서 어느정도 상황이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급격한 도시화는 식량 문제를 초래했는데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혼밥 장려를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진짜 양반이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통해서 무리하게 공업화를 시도한 결과 2500만명이 아사하는 결과와 함께 공업화의 실패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북한도 1970년대까지 나름대로 고도의 경제 발전을 구가하지만 80년대 사회주의 체제 전반의 침체가 벌어진 뒤, 90년대 동구권 붕괴로 식량 공급이 단절되면서 고난의 행군이 벌어진다.

이는 한국의 식량 생산에 대한 관점으로 보면 너무 명확한데, 한국은 그다지 벼농사를 짓기에는 막 좋은 곳은 아니다. 물론 이 동아시아가 유럽과 함께 농업 생산력이 높은 지역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동아시아는 늘 나름대로 G15안에는 꾸준히 들었던 국가이다. 일반인들이 굉장히 무시하는(사실 그렇게 무시받을 만한 나라가 아님에도) 조선 역시도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당시 G15정도는 꾸준히 들었던 국가이다. 당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결코 비중이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여하튼 이 한국은 위도가 높기 때문에 일단 벼농사 한계 지점이 임진강에 걸쳐 있다. 그 위로는 벼농사를 짓지 못하며 지어도 질로 보나 양으로 보나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래서 이태준의 <농군>을 보면 벼농사를 짓겠다는 조선인과 밭농사를 짓겠다는 만주인들이 갈등을 벌이기도 하지 않는가. 이런 면모는 한국사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한국 사회의 모내기법이 일본이 1000년 전에 받아들여 전국화했던 반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야 전국 확대가 가능해진 것도 그만큼 기술이 발달해서야 모내기법이 가능해진 것일 뿐 아니라 위도가 높기 때문에 모내기법과 같은 대박을 치면 식량 생산이 급증하지만 한번 가뭄이 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막은 것이다. 국가차원에서 안정된 세수 그리고 안정된 후생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모내기보다는 직파법을 선호한 것이다. 그리고 삼남 지방이 중요한 것 역시도 GDP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홍경래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고.

한편 일본은 장마가 한달 빠르고 화산지대이다보니 토질도 괜찮은 편이니 모내기법을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이들은 정치체제가 대정봉환(68년)이전까지 중세적 봉건체제에 머무른데다가(물론 근대 국가에서 이 봉건적 시스템은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조선은 근대화가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일본은 각자가 세금을 거두고 근대화를 할 수 있으니 중앙 정권의 근대화의 압력이 조금 덜할 수 있었다.) 문화적 수준도 성리학을 1300년대에 받아들인 것과 달리 일본은 1600년대에 이르러서 받아들이는 등 굉장히 후진적인 모습을 띈다. 물론 이시기에 난학 등을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난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그냥 취미활동일 뿐이며 이는 요즘 지나치게 고평가 받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과연 일본 내에서 자생적인 무언가가 있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움직임을 가진다. 여하튼 GDP는 에도 시대를 기점으로 조선을 역전하는데 이 역전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중앙집권화하지 못해서 그냥 여전히 오랑캐 취급을 받은 것이다.

여하튼 이런 말을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농업이 근대화의 가장 큰 축이었다. 지금 북한이 근대화가 안되는 이유는 전혀 농업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아니 막말로 북한이 베트남 아니 한국정도의 식량 생산량을 자랑했으면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게다. 소위 개혁 개방도 안정적이었을 것이고. 하지만, 식량 생산이 막장으로 나아가니 급격히 붕괴할 수밖에...

#4

가노 쓰네노부 <正德度朝鮮通信使行列繪卷> 1711년 제8차 통신사

이렇게 굉장히 긴 시간을 농업을 설명하는 데에 쓰는 이유는 일단 사람들이 산업혁명을 이야기할 때 혹은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할 때 지나치게 농업을 경시하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농업은 산업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실제로 당시 부르주아라고 일컬었을 때 상업 부르주아라고 이야기되기보단 차라리 농업 부르주아가 더 비중이 컸으며 이는 이후 수정주의 관점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이시기 농업의 비중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늘 80%대를 웃돌면서도 1851년에 가서야 영국에서 처음으로 공업의 비중이 51%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이 산업화 시대에도 농업의 비중을 결코 무시하면 안된다.

이렇게 오늘은 주로 농업 이야기를 하였다. 물론 오늘 할 이야기는 주로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두 시선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관점 간의 투쟁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늘 그렇듯이 잘 되지 않았다... 다음 시간에 아마 이야기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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